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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2021년
제목 [10.17] 고난으로 순종을 배우다 | 정원진 목사
작성자 seouljeil
작성일자 2021-10-17
조회수 24
첨부파일
p211017_질그릇 1단.pdf

고난으로 순종을 배우다

 

1각 대제사장은 사람들 가운데서 뽑혀서 하나님과 관계되는 일에 임명받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사람들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의 희생 제사를 드립니다. 2그는 자기도 연약함에 휘말려 있으므로, 그릇된 길을 가는 무지한 사람들을 너그러이 대할 수 있습니다. 3그는 백성을 위해서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연약함 때문에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4누구든지 이 영예는 자기 스스로 얻는 것이 아니라,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얻는 것입니다. 5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자기 자신을 스스로 높여서 대제사장이 되는 영광을 차지하신 것이 아니라, 그에게 너는 내 아들이다.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하고 말씀하신 분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6또 다른 곳에서 너는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라 임명받은 영원한 제사장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7예수께서 육신으로 세상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분께 큰 부르짖음과 많은 눈물로써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경외심을 보시어서, 그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 8그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9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10하나님에게서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라 대제사장으로 임명을 받으셨습니다. (5:1-10)

 

껄끄러운 히브리서

지난 주일은 한일합동수양회 때문에 건너뛰었고, 오늘이 지지난 주일에 이어서 히브리서 연속 증언을 하는 두 번째 시간입니다. 첫 증언 때 말씀드렸듯이, 이런저런 이유로 이번에 제가 히브리서를 증언할 기회는 총 7번 중 3번밖에 없습니다. 이게 저에게는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그 이유는 히브리서가 어렵기 때문이 아닙니다. 제가 받아들이기 힘든 주장을 히브리서가 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를 읽을 때마다 힘이 듭니다. 그 이유는 제가 역사적 예수를 전공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신앙의 그리스도’(faith of Christ)에 대비되는 개념입니다. ‘역사적 예수인간 예수를 가리키는 말이고, ‘신앙의 그리스도신격화된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가 그리스도다라는 고백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기독교는 역사적인 인물 예수신앙의 대상인 그리스도라고 믿는 종교입니다. , 우리는 예수에게서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골로새서 115절의 증언, “예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Jesus is the image of the invisible God)”가 바로 그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게 됩니다. 이렇듯 기독교는 하나님의 결정적인 계시를 한 인격(a person) 속에서 발견합니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구별되는 특징이 바로 이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인간에게 계시합니다. 자연을 통해서도 계시하고, 경전(經典)성경을 통해서도 계시하십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역사적인 한 인물 예수가 가장 결정적인 계시였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예수가 그리스도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가 없다면 당연히 그리스도도 없고, ‘기독교도 없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와 기독교의 뿌리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기독교는 역사적 예수는 잊어버리고 신앙의 그리스도에만 관심해 왔습니다. 그래서 예수 없는 기독교”(Christianity without Jesus)가 되어버렸습니다. 이에 잃어버린 기독교의 뿌리를 찾고자 역사적 예수 연구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의 역사적 예수 연구가 다다른 몇 가지 결론은 히브리서의 주요한 신학적 주장과 어긋나는 듯이 보입니다. 제가 교우 여러분께 수차례 소개한 바 있는 존 도미닉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과 마커스 보그(Marcus J. Borg)중보자’(仲保者, mediator)로서의 예수상()대속’(代贖, substitutionary sacrificial atonement) 신앙을 부정합니다.

이에 비해 히브리서는 성경 중 유일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하고 위대한 대제사장으로 선포하고 있으며, 그 이유는 대제사장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단 한 번의(once for all) 희생제물로 십자가에서 자기 자신을 바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대제사장은 중보자 이미지와 통하고, 십자가 속죄 제물은 대속 신앙과 연결되기에 역사적 예수를 전공한 제가, 특별히 보그와 크로산을 전공한 제가 히브리서를 증언하는 것은 매우 힘이 드는 일입니다.

 

중개인 없는 하나님 나라

중보자로서의 예수상대속 신앙의 부정, 이 두 가지 가운데 오늘은 본문과 결부된 중보자로서의 예수상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역사적 예수 학자들이 중보자 예수상을 부정하는 근거는 과연 뭘까요?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당시의 성전과 그 기능에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죄를 지으면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제물을 바치고 제사를 지냄으로써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를 회복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병자들을 치유하신 후에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말씀하곤 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당시에 병은 죄 때문에 걸린다고 생각했고, 병에 걸리면 제사를 통해 죄 사함을 받아야 한다고 믿었는데,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라는 말은 성전에 가서 제사를 지내지 않고도 네 병이 나았다, 죄 사함을 받았다라는 말 아닙니까? 이 말은 성전 제사가 필요 없다는 말 아닙니까? 이는 세례자 요한이 죄를 용서받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며 요단강에서 세례 운동을 벌였던 것과 유사합니다. 세례자 요한 역시 예루살렘 성전과 거기서 행해지는 제사의식을 부정했습니다. “성전도 제사도 다 필요 없다. 죄를 용서받으려면 지금 요단강에 와서 세례를 받아라.” 이게 세례자 요한의 핵심 주장이었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은 생애 마지막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십니다. 그 이유는 예루살렘 입성 시위와 예루살렘 성전 시위를 하기 위함이었는데, 우리가 흔히 예루살렘 성전 정화나 성전 숙정으로 알고 있는 사건이 실은 성전 파괴 행위였다고 제가 예전에 복음서를 증언하면서 말씀드렸었습니다. 그러니까 고쳐서 다시 쓰겠다는 것이 아니고, “다시는 쓰기 않기 위해서, 폐기하기 위해서 부수겠다는 것이 예루살렘 성전 시위의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재활용이 아니라 불활용(不活用)’이 그 목적이었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당시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개자 역할을 담당했던 성전을 철저히 반대했습니다.

둘째, 그렇다고 예수님은 성전을 대신할 새로운 중보자가 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루살렘 대신 요단강을 새로운 거점으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가버나움에 있던 베드로 장모 집이 치유의 거점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 그곳이 다른 곳에 비해 우월한 장소가 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고을을 돌아다니며 병자를 치유하셨습니다. 더구나 치유의 공()도 자신에게 돌리지 않았습니다. “내가 너를 구원했다. 치유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말씀하심으로써 당신이 있어야 치유가 일어날 수 있음도 부인하셨습니다.

요약하면,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특정한 장소가 다른 장소에 비해 우월하다는 장소의 계급화를 부정하셨습니다. 나아가 당신 자신을 포함해 제사장 같은 특정 사람이 다른 사람에 비해 우등하다는 사람의 계급화도 부정하셨습니다. 그런데 장소의 계급화, 사람의 계급화는 중개자(broker) 역할 때문에 발생합니다. 중개자가 있어야 죄 사함도, 치유도, 관계 회복도, 구원도 있습니다. 그런데 열린 밥상공동체와 공짜 치유를 그 내용으로 하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서로서로 돕는상부상조하는 평등한 공동체였기에 중개인이 필요 없었습니다. 이것이 세례자 요한의 세례 운동과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결정적인 차이점입니다. 세례 운동은 세례자 요한이라는 중개자가 독점한 monopoly였고, 하나님 나라 운동은 예수라는 중개자가 없이도 이곳저곳에서 펼쳐진 franchise였습니다. 이렇듯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가리키는 하나님 나라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차별이 없고, 사람과 하나님도 아무 장벽 없이 친교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역사적 예수 학자들은 중개인(broker)으로서의 예수상을 분명하게 거부합니다. 같은 이유로 중보자(mediator)로서의 예수상도 별로 긍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중보자의 사전적 의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서서 그 관계를 성립시키고 화해를 가져오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성전시대에는 제사장이 중보자였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예수가 중보자라고 기독교는 가르쳐 왔습니다. 그래서 과거에는 성전이 하나님을 독점했고, 지금은 교회가 하나님을 독점하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 예수 천국, 불신 지옥!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주장이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는 다른 종교인과 조화롭게 어울려 살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가 위대하고 영원한 대제사장?

사정이 이러한데 히브리서는 예수를 위대하고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선포합니다. 예수가 중보자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예전에는 히브리서를 그냥 무시하고 지나쳤는데, 증언 본문으로 주어지니 그게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해답을 찾았습니다.

첫째, 이것은 예수에 대한 하나의 해석입니다. 즉 예수가 그들에게 누구인지(또는 누가 되었는지)를 고백한 초대교회의 여러 해석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나의 해석이지, ‘유일한해석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 해석은 히브리서 공동체에는 적절하고 적합하지만, 모든 기독교 공동체에도 꼭 그렇지는 않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특별한 해석이지 보편적인 해석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 특별한 해석이 성경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둘째, 이런 특별한 해석이 등장한 이유는 인간의 필요때문입니다. 강 이편에서 저편으로 건너가려면 가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약한 인간에게 중보자가 큰 도움이 됩니다. 내 연약함을 채워주고 도와주는 이가 있으면 힘이 됩니다. 물론 예수님은 배 필요 없다. 수영해서 충분히 건널 수 있다고 하셨지만, 우리는 엄두가 나지 않아 배가 있었으면 합니다. 이렇듯 인간의 약함 때문에 히브리서 공동체는 중보자를 필요로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2.3절에 연약함이라는 표현이 나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셋째, 예수가 대제사장이라는 것은 은유입니다. 예수가 누구인지를 설명하기 위한 언어적 표현입니다. 언어는 애초부터 완전하지 않고 불완전합니다. 그것을 보완하는 방법이 은유인데, 은유는 “~으로 보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는 선한 목자다라는 은유적인 표현은 나는 예수를 갈길 잃어 방황하는 나를 바른길로 인도하는 선한 목자로 본다라는 뜻입니다. 만약 우리가 비문자적 표현인 은유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면 문제가 생깁니다.

이상을 종합하면 우리는 예수를 위대하고 영원한 대제사장이라고 한 히브리서의 선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공동체는 역사적 예수가 비록 중보자 없는 하나님 나라’(brokerless kingdom of god)를 실천하고 가르쳤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약함과 필요성 때문에 예수님을 자신들과 하나님을 연결해주는 대제사장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이보다 더 좋은 은유를 찾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히브리서 공동체가 찾은 은유가 하필 대제사장이었기에 우리는 (동의하지는 못해도) 적어도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더구나 대제사장을 이르는 말은 폰티프(pontiff)인데, 이 말은 다리를 놓는 사람이라는 뜻의 폰티펙스(pontifex)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따라서 대제사장 예수라는 말이 어색하면 다리를 놓는 사람 예수라고 바꿔읽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는 하늘과 땅 사이에 다리를 놓았습니다.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 거룩한 것과 속된 것 사이, 남자와 여자 사이, 종과 주인 사이에 다리를 놓아 서로 소통하게 하고 상생하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꼭 주의할 것은 예수가 대제사장이다. 예수가 중보자다라는 은유적 표현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서 절대화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중보자다가 되고, 이런 해석은 역사적 예수의 신앙과 삶에 정반대가 됩니다. 그런 기독교는 뿌리 없는 기독교, 예수와 연속성이 없는 가짜 기독교일 뿐입니다.

 

고난으로 순종을 배우다

끝으로 먼 길을 돌아 오늘 제목으로 택한 본문 8절 말씀을 보겠습니. 8절은 그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라고 증언합니다. 복음서에서 만나는 예수님은 가르치는 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예수님이 배우셨다고 합니다. 신약성경에 딱 한 번 나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신적 존재로 보기에 배우셨다는 말에 당황합니다. 하지만 배움이야말로 예수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의 아픔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익혔고, 고통받는 이들 곁으로 다가섬을 통해 사랑을 배우셨습니다. 예수님이 겪었던 고난은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애쓰는 과정에서 겪은 아픔이 아닙니다. 악한 세상에서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 겪을 수밖에 없었던 아픔입니다. 예수님은 자발적으로 고난 속으로 걸어 들어가심을 통해 하나님의 뜻 안에 확고히 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히브리서 저자는 고난으로 순종을 배웠다고 했고, 마침내 완전하게 되셨다고 증언합니다.

순종을 뜻하는 영어 단어 ‘obedience’잘 듣는다라는 뜻의 라틴어 단어(ob-audire)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순종이란 귀 기울여 듣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에게 건네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뜻을 분별하여 따르는 것이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기 위해 주의 깊게 듣는 태도로 살 때 우리는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마음을 모으는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욕망을 내려놓았습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길이야말로 하나님께 이르는 길임을 예수님은 당신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역사적 예수가 신앙의 그리스도가 된 것이 그 분명한 증거입니다.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고, 마침내 완전하게 되신 예수님은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길을 찾으시던 예수님은 스스로 구원의 길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 순종한다는 말은 예수님의 길을 자기 길로 삼는다는 말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이 구원은 아무에게나 싸구려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하는 모든 사람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예수를 우리 인생의 길로 삼았다는 뜻입니다. 남이 뭐라 하든 그 길은 내게 유일한 길(the way)입니다. 그 길은 내가 만든 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몸을 바쳐 열어놓으신 길입니다. 우리는 다만 그 길을 걸으면 됩니다. 길은 가라고 있는 것이지, 믿거나 바라보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듯 히브리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고난으로 순종을 배우라고 말합니다. 나아가 순종함으로 구원을 얻으라고 하십니다. 이제 우리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강도 만난 이웃을 통해 말씀하시고, 피조물의 신음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에 따라 살아가십시오. 때로는 그 길은 십자가의 길일 것입니다. 손해 보고 고난을 받는 길일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앞서서 걸으셨으니 묵묵히 그리고 기꺼이 따라 걸으십시오. 그러면 마침내 구원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