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듭짓기

9주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이집트에서 받은 수치를, 오늘 내가 없애 버렸다." 그리하여 그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고 한다. 10이스라엘 자손은 길갈에 진을 치고, 그달 열나흗날 저녁에 여리고 근방 평야에서 유월절을 지켰다. 11유월절 다음날, 그들은 그 땅의 소출을 먹었다. 바로 그날에, 그들은 누룩을 넣지 않은 빵과 볶은 곡식을 먹었다. 12그 땅의 소출을 먹은 다음 날부터 만나가 그쳐서, 이스라엘 자손은 더 이상 만나를 얻지 못하였다. 그들은 그 해에 가나안 땅에서 나는 것을 먹었다. (수 5:9-12)

여호수아기의 배경

어느덧 사순절 넷째 주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구약 본문은 여호수아 5장 9절로 12절의 말씀입니다. 지난 주일 구약 본문이 (제2)이사야에서 주어졌고, 또 다음 주일과 다다음 주일 본문 역시 (제2)이사야에서 주어지는데, 오늘은 갑자기 여호수아의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잘 아시듯이 ‘여호수아’는 ‘모세오경’의 마지막 책인 ‘신명기’에 이어지는 책으로 출애굽 공동체가 40년 광야 여정을 마치고 약속과 축복의 땅 가나안에 진입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 말씀으로 사순절의 교훈을 되새겨보고자 합니다.

출애굽의 영도자 모세는 가나안을 바라만 보고 들어가지는 못합니다. 신명기의 마지막 장인 34장에 따르면 모세는 ‘느보산 비스가 봉우리에 올라’ 약속의 땅 가나안을 바라다봅니다(1절). 하지만 그리고 들어가는 것까지는 허락되지 않았습니다(4절). 그래서 모세는 거기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합니다. 그런데 신명기 34장 7절은 “모세가 죽을 때에 나이가 백스무 살이었으나, 그의 눈은 빛을 잃지 않았고, 기력은 정정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는 노쇠해서 죽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역할과 시대는 거기까지였던 것입니다.

모세를 이어 이스라엘의 새 영도자가 된 사람은 눈의 아들 여호수아입니다(신 34:9). 이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전 백성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땅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의 광야 시대는 막을 내리고 새로운 가나안 시대가 펼쳐지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새 시대는 저절로 오지 않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가 있어야 하듯이, 새 시대는 새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가나안 시대의 영도자는 모세에서 여호수아로 바뀌었고, 가나안 시대의 백성 역시 출애굽 세대에서 광야에서 태어난 새 세대로 바뀌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훈련

하지만 출애굽 1세대가 아닌 광야에서 태어난 출애굽 2세대의 하나님 신앙은 ‘자기 신앙’이 아닌 ‘부모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직접 경험해서’(first-hand experience) 갖게 된 믿음이 아니라, ‘간접 경험을 통해서’(second-hand experience) 얻은 믿음이었습니다. 직접 경험을 통해 형성된 튼튼한 믿음도 ‘광야’에서 속절없이 무너졌는데, 간접 경험을 통해 형성된 믿음이 과연 ‘가나안’에서 잘 버틸 수 있을까요? 따라서 여호수아는 본격적인 가나안 진입에 앞서 백성들을 신앙적으로 강하게 훈련 시킵니다. 그것이 여호수아 2장에서 5장까지의 내용입니다.

먼저 2장에는 여호수아가 여리고로 정탐꾼을 보낸 얘기가 나옵니다. 정탐꾼들은 창녀 라합의 도움을 받고 살아 돌아와서 “주님께서 그 땅을 모두 우리 손에 넘겨주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주민이 우리를 무서워하고 있다”(수 2:24)고 보고합니다. 그들이 겪은 일로 인해 백성들은 ‘혹시’ 하는 의심을 떨쳐버렸을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약속’이 빈말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사건 역시 정탐꾼 두 명만 직접 경험하고 나머지 백성들은 간접 경험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이제부터 백성 전체가 하나님을 경험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그것이 3장과 4장에 나오는 요단강을 건넌 이야기입니다. 40년 전 애굽을 떠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향해 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 바다 앞에서 최초의 위기를 만났습니다. 앞에는 홍해의 푸른 물이 넘실거리고, 뒤에는 바로의 군사들이 추격하고, 진퇴양난의 절박한 순간에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시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너가게 하셨습니다.

이제 광야에서 태어나고 광야에서 자라난 사람들이 여호수아의 영도 하에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 앞에는 요단강이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마치 그들의 조상이 홍해를 건넜던 것처럼 그들 또한 요단강을 건너야 했습니다. 마침 추수철이어서 강물은 제방까지 차올라 철썩이고 있었습니다. 안전한 마른 땅을 떠나 강물에 발을 들여놓는다는 것은 정말 용기가 있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에 닿는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흘러내리던 물줄기가 끊기고, 물이 둑처럼 일어섰습니다. 그들은 물이 만든 둑 사이의 마른 땅을 걸어 건너편 언덕에 이르렀습니다. 제사장들은 백성들이 강을 다 건널 때까지 강 한복판에 우뚝 서 있었습니다.

이제 백성들이 강을 다 건너자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지파마다 한 사람씩을 뽑아서 제사장들이 서 있던 곳에 가서 돌 열두 개를 가져오라고 명령합니다. 그러자 각 지파에서 뽑힌 사람들은 여호수아의 명령에 따라 요단강 한복판에서 돌을 가져다가 자기들이 머무르려는 곳에 두고 ‘도강(渡江) 기념비’로 삼았습니다.

이 도강 기념비는 당일 요단강을 건넌 모든 백성이 생생하게 체험한 구원사건의 ‘증거’로 남게 될 것입니다. 성경의 기적 사건을 합리적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사람은 이 사건을 “해빙기에 산사태로 요단강물이 막히는 절호의 기회를 틈타 전격적으로 도강을 감행한 한 사건”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객관적 사실이 어떠했던 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성경의 백성들이 그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무어라 고백했는지만 중요합니다. 저들은 ‘요단강 도강 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억하며 고백하고 있습니다.

21”당신들 자손이 훗날 그 아버지들에게 이 돌들의 뜻이 무엇인지를 묻거든, 22당신들은 자손에게 이렇게 알려 주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이 이 요단강을 마른 땅으로 건넜다. 23우리가 홍해를 다 건널 때까지, 주 우리의 하나님이 우리 앞에서 그것을 마르게 하신 것과 같이, 우리가 요단강을 다 건널 때까지, 주 우리의 하나님이 요단강 물을 마르게 하셨다. 24그렇게 하신 것은, 땅의 모든 백성이 주님의 능력이 얼마나 강하신가를 알도록 하고, 우리가 영원토록 주 우리의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수 4:21-24)

이러한 ‘경험의 공유’는 ‘공동체’의 토대가 됩니다. 함께 고생하고 땀 흘리고 기쁨과 슬픔을 나누고 죽을 고비를 넘겼을 때 그들 속에는 깊은 연대감이 생기고, 그들은 비로소 공동체를 이루게 됩니다. 나아가 이런 ‘경험의 공유’는 ‘기억의 공유’로 이어져 그 공동체를 더욱 굳건하게 유지시킬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열두 돌무더기 도강 기념비는 이스라엘의 ‘기억의 성소’가 되어 저들이 힘겨울 때마다 되돌아와 용기를 얻는 샘 역할을 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요단강을 건넜다’(cross over)는 것이 장소의 이동만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핵심은 ‘건넜다’는 말에 있습니다. 요단강은 옛 삶과 새 삶의 경계입니다. 따라서 ‘요단강을 건넜다’는 것은 옛 삶과의 단절과 새로운 삶으로의 진입을 상징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은 일종의 ‘무덤’인 셈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준 것도 바로 그런 의미에서 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요단강에서 함께 죽고 다시 사는 과정을 통해 운명 공동체로 형성되었던 것입니다.

‘길갈’에서 할례를 받다

그들이 요단강을 건너 머무른 곳은 ‘길갈’이었습니다. 그곳 지명이 ‘길갈’로 불리게 된 이유를 오늘 본문 9절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주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이집트에서 받은 수치를, 오늘 내가 없애 버렸다.’ 그리하여 그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없애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단어가 ‘갈랄’인데, 여기서 지명 ‘길갈’이 유래했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바로 앞에는 ‘애굽에서 받은 수치를 없애는 예식’으로 ‘할례’가 베풀어졌다고 전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세례’가 입교의식인 것처럼, 유대인에게는 ‘할례’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할례 의식을 행한 ‘때’와 ‘장소’가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 ‘때’는 요단강을 건넌 직후였고, 그 ‘장소’는 여리고를 코앞에 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4장은 야곱의 딸 디나가 성폭행 당한 사건을 전합니다. 당시에 야곱의 아들들은 디나를 아내 삼고자 청혼한 성폭행범에게 “할례를 받지 않은 남자에게 우리의 누이를 줄 수 없다”라고 하자, 그를 비롯한 그 성읍의 모든 장정이 기꺼이 할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사흘 뒤에, 장정 모두가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아서 아파하고 있을 때에, 야곱의 아들들 곧 디나의 친오라버니들인 시므온과 레위가, 칼을 들고 성읍으로 쳐들어가서, 순식간에 남자들을 모조리 죽였습니다”(25절).

이 사건에서 분명히 알 수 있듯이, 할례를 받은 장정은 전투하기 힘이 듭니다. 그런데 여리고 전투를 앞둔 시점에서 강 저쪽 편이 아닌 이쪽 편에 있으면서 할례를 행하라니요? 하지만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돌칼을 만들어 할례를 행하라”는 지시가 떨어집니다. 광야에서 태어난 백성들이 할례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하지만 경계태세를 강화하고 전력을 극대화해야 할 시간에 할례를 행한다는 것은 무모하고도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할례를 행하라는 지시를 받은 백성들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이런 우리의 궁금증은 전혀 충족되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들이 느꼈을 당혹감, 수군거림, 망설임을 전혀 기록하지 않고 일의 경과만 5장 8절에 간략히 보도하고 있습니다.

백성이 모두 할례를 받고 나서 다 낫기까지 진 안에 머물러 있었다. (5:8)

이 대책 없는 순종을 어찌 이해해야 할까요? 그것은 고통을 통해 터득한 삶의 지혜였습니다. 광야를 거쳐 오는 동안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힘이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경험했습니다. 지금 당장은 이해할 수 없다 해도, 하나님은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고 우리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 삶은 든든해집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할례를 행한 후에야 할례를 명하신 까닭을 밝히십니다.

너희가 이집트에서 받은 수치를, 오늘 내가 없애버렸다. (5:9)

할례는 이스라엘 백성의 기억 속에 각인된 애굽을 몰아내는 의식이었던 셈입니다. 가끔 우리 삶에는 이런 의례가 필요합니다. 13세기의 성자 아씨시의 프란체스코가 남긴 일화 가운데 이런 것이 있습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기도하던 프란체스코는 어느 날 “나의 교회를 다시 세우라”는 주님의 명령을 듣습니다. 당시 그는 부유한 포목상이었던 아버지 피에트로의 가게 몇 개를 돌보고 있었는데, 돈이 생기는 대로 그것을 교회 수리에 다 썼습니다. 아들이 자기 돈을 탕진할 뿐 아니라, 천한 이들이 하는 노동을 함으로써 가족의 명예를 손상한다고 생각한 아버지는 아들을 귀도 주교에게 데려갑니다. 화가 난 그는 이제 부자 관계를 청산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사실 그가 이렇게 험하게 나온 것은 우선은 돈을 되찾고 싶어서였고, 부차적 목적은 아들에게 경각심을 불어넣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느닷없이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돌돌 말아 아버지 발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그 망측한 모습에 놀란 주교는 얼른 자기 망토를 벗어 프란체스코의 알몸을 덮어주었습니다. 화가 지오토는 바로 이 광경을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알몸이 됨으로써 프란체스코는 옛 세계와 단절했습니다. 주교의 망토는 프란체스코의 새로운 운명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제 오로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사는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적진을 앞에 두고 할례를 행함으로써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새로운 백성으로 거듭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길갈에서 유월절을 지키다

이제 요단강을 건넌 사건을 통해, 또 위험 가운데 과감히 할례를 받은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은 새로운 단계로 들어섭니다. 진정한 가나안 진입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것을 알리는 신호가 ‘유월절’을 지킨 것입니다. 유월절이 무엇입니까? 넘을 ‘유’(逾)와 넘을 ‘월’(越) 자를 쓰는 ‘유월’이란 말은 영어로 ‘pass–over’입니다. ‘지나가다’란 말입니다. 이 말은 애굽을 탈출하기 전날 밤 하나님이 각 집의 장남을 죽였는데, 이스라엘 백성의 집에는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게 하여 그 표지가 있는 집은 그냥 지나쳤다는 데서 유래한 말입니다. 그러니까 첫 유월절에 출애굽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 유월절을 지킴으로써 가나안 진입을 시작합니다. 요단강을 cross-over 했듯이—건넜듯이, 이제 가나안의 성들을 pass-over 하면서—건너뛰면서 점령하게 될 것입니다.

전환점이 되는 순간

개인의 삶이나 한 공동체의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사건들이 있습니다. 전환점이 되는 사건들이 그것입니다. 그 사건들은 과거를 과거로 매듭짓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 발돋움하는 계기가 됩니다. 오늘 본문이 증언하는 ‘길갈’에서의 사건들이 그 구체적인 예입니다. 요단강을 건넌 사건, 도강 기념비를 세운 사건, 적의 성 코앞에서 할례를 받은 사건, 유월절을 지킨 사건 등등은 출애굽 1세대가 출애굽 2세대로 교체되는 본격적인 전환점이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 2세대는 곧 가나안 1세대이기도 합니다. 본문 11절은 이것을 “유월절 다음날, 그들은 그 땅의 소출을 먹었다. 바로 그날에, 그들은 누룩을 넣지 않은 빵과 볶은 곡식을 먹었다”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약속이 땅 가나안은 기회의 땅이지만 동시에 위험의 땅이기도 합니다. 본문 12절은 이 사실을 “그 땅의 소출을 먹은 다음 날부터 만나가 그쳐서, 이스라엘 자손은 더 이상 만나를 얻지 못하였다. 그들은 그 해에 가나안 땅에서 나는 것을 먹었다”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길갈에 진을 치고 거기에서 나온 땅의 소출을 먹기 시작하자 하늘에서는 만나가 내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만나가 더는 내려오지 않게 된 사태가 비극만은 아니었습니다. 대신 그들은 다양한 음식을 먹게 되었고, 땅의 것을 먹고 하늘을 섬기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은 풍요의 땅이기도 합니다. 만약 저들이 다양한 음식을 먹으며 풍요만을 추구할 때 그 땅은 기회가 아닌 위험으로 다가설 것입니다.

매듭짓기

오늘 증언 제목을 좀 엉뚱하게 ‘매듭짓기’라고 했습니다. ‘매듭’이라고 하면 흔히 ‘끝’이나 ‘마무리’라는 의미가 떠오릅니다. 하지만 매듭이라는 말은 ‘종결’을 의미함과 동시에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합니다. 즉, 어떤 일을 ‘매듭지었다’라는 말은 ‘이어서 새로운 일이 시작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때의 시작은 그 이전의 시작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시작입니다. 대나무를 예를 들어서 설명하면, 대나무 매듭 위에는 새로운 줄기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그 줄기는 예전 줄기보다 높은 자리에 위치합니다. 또한, 대나무가 줄기가 굵지 않음에도 강한 것은, 다른 나무와 달리 일정한 간격을 두고 매듭을 지을 줄 알기 때문입니다. 매듭이 있는 대나무는 강한 폭풍에도 꺾이는 법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출애굽 2세대가 어떻게 광야 생활을 매듭짓고 가나안 생활로 진입하는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앞서 설명한 이런저런 신앙 훈련을 통해 저들은 부모의 신앙을 자기 신앙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과거의 잘못과 부족함을 매듭짓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알듯이 저들은 가나안의 풍요 앞에서 신앙의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사람은 보통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게 아니라 사는 대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느 신학자는 ‘사람은 삶을 위한 도구를 바꾸는 순간 신까지 바꾼다’고 말했습니다. 적확한 말입니다. 삶이 편안해지고 가진 것이 많아지면 삶과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기 마련이고, 그것은 결국 다른 신을 섬기는 일로,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일로 귀착되게 마련입니다.

사순절은 그것을 방지하고자 자신을 성찰하고 허물과 잘못을 매듭짓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자기 좋을 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 것을 훈련하는 기간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이 풍요로운 세상 속에서 참믿음을 지키며 살 수 있습니다. 조금 불편하게 사는 연습을 하지 않으면 조금도 불편하게 살지 못하게 됩니다. 그것이 타락의 다른 이름입니다. 아무쪼록 남은 사순절을 충실히 보내면서 과거의 나를 매듭짓고 새롭게 다시 출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