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세계를 살아감으로 하나 되는 사람들”

26여러분은 모두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27여러분은 모두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28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29여러분이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면, 여러분은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약속을 따라 정해진 상속자들입니다. (갈 3:26-29)

서울제일교회와의 만남

오늘 저에게 설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청년주일에 청년회 담당 목사로서 맡은 설교이지만, 서울제일교회 소속 목사로서 선보이는 첫 설교이기도 하기에, 서울제일교회에서 일하게 된 개인적인 소회부터 간단히 말씀드리는 것이 순서일 듯 싶습니다.

저는 2022년 6월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발주한 연구용역에 역사문제연구소와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소속 연구자들로 공동 연구진을 구성하여 지원했고 선정되어 현재 <1970년대 민주화운동 부문 운동사(개신교)> 연구프로젝트를 진행 중입니다. 저는 한국 현대사 연구자들과 민중신학자들로 구성된 이 연구진 전체를 이끄는 연구책임자로서, 1차년도인 2022년에는 개신교 민주화운동 관련 자료 발굴 및 해제 작업을 수행했고, 2차년도인 2023년에는 본격적인 통사 집필 작업을 주도했습니다. 그리고 올해 2024년 가을에 최종 결과물을 단행본으로 묶어 내고자 준비 중에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에서 저는 1970년대 초반 한국에서 도시산업선교와 도시빈민선교가 출현하는 역사적 과정을 서술하고, 민주화운동에 관한 사상사‧지성사 연구의 넓은 맥락 안에서 민중신학의 논리구조를 해석하는 파트의 집필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수주水洲 박형규朴炯圭’라는 이름과 마주할 수밖에 없었고, 자연스럽게 박목사님 당신께서 민주화운동과 민중운동을 이끄는 중에 목회하신 서울제일교회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박목사님의 저서들, 박목사님에 관한 2차 자료들, 서울제일교회의 사회선교 및 민주화운동 관련 자료들을 열심히 찾아 읽으면서, 덕분에 제가 집필을 맡은 개신교 민중운동 파트에 관한 이해를 심화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기회가 되면 박목사님과 민중운동, 민중신학의 관계를 중심으로 학술논문을 한 편 써야겠다 생각하고 있던 중에, 놀랍게도 한국 교회사와 민주화운동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서울제일교회에 청년회 담당 교육목사로 오게 되었고, 더욱 감사하게도 박형규목사기념사업회의 사무국장으로 일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자리를 빌려, 서울제일교회 교우님들이 그동안 예수를 따라 걸어온 그 고난과 역경의 길에 대해 민주화운동사 연구자이자 민중신학 연구자로서 마음을 다해 경의를 표합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제 연구의 주요 관심사 가운데 하나였던 인물과 교회가 이제 목사로서 저의 사역 현장이 되었다는 사실이 한편으로 아직도 잘 믿기지 않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거운 책임감 속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도 없지 않습니다. 맡은 바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가운데 한국 개신교의 민주화운동사, 그리고 박목사님이 말한 대로, “하나님이 교회의 테두리를 넘어서 일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민중운동사에서 수주와 서울제일교회가 남긴 자취를 학문적으로 정리하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구원=해방=자유

오늘 우리가 그 일부를 함께 읽은 성서는 사도 바울의 갈라디아서입니다. 갈라디아서는 그리스도교의 역사에서 ‘그리스도교회의 독립선언서’, ‘그리스도교 자유의 대헌장’(Magna Carta of Christian freedom)으로 불리어 왔습니다. 그런 별명이 붙은 이유는 특히 이 서신에서 바울이 구원사건의 의미를 해방 또는 자유의 관점에서 적극적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서신의 인사말에 해당하는 1장 4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개역개정).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기꺼이 내어주신 이유입니다.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에서 ‘건지시려고’/‘건져 주시려고’로 번역된 단어는 ‘에크셀레타이’(ekseletai)입니다. 원어 기본형은 ‘엑사이레오’(exaireô)인데, ‘~에서’를 뜻하는 ‘ek’라는 전치사와 결합하여 사용되고 있고, 그 의미는 “~의 손아귀에서 구해내다” 또는 “~으로부터 구출하다, 구조하다”입니다. 아울러 이 단어는 바울이 사용하는 또 다른 단어인 ‘엑사고라조’(exagorazô)라는 동사와 문맥상 그 의미가 일치합니다. ‘엑사고라조’는 한글 성서에서는 ‘속량하다’로 주로 번역되었는데(갈 3:13; 4:5), 직역하면 “~의 노예 상태에서 사들이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1장 4절은 원어의 의미를 보다 신중히 고려했을 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행동하여 현재의 악한 시대/세대의 손아귀에서 우리를 구조해 내시려고 우리의 죄들의 치명적인 결과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주셨다”로 옮길 수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오는 메시아 사건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지배하는 악으로부터, 또는 악이 지배하는 노예적인 상태로부터 우리를 구출해 내는 과정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물론 바울의 관점에서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악한 세력은 ‘혈과 육’, 즉 ‘피와 살’을 가진 구체적인 적(敵)이 아니라 그보다 더욱 추상적이고 구조적이며 객관적인 ‘현재의 악한 세대/시대’ 그 자체입니다(엡 6:12 참조). 바울은 종종 자신이 살았던 당대를 시간적인 차원에서 현 시대/현 세대로 표현하지만, 때로는 그와 동의어로 ‘세상’(κόσμος)이라는 공간적인 용어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출해 내는 조건이란 결국 시공간적 차원을 포괄하여 “현 시대의 악한 세계 전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바울이 구원사건을 노예로부터의 해방, 지배로부터의 자유라는 의미에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은 5장 1절에서 보다 명확히 확인됩니다. 참고로 갈라디아서 전체를 놓고 보자면, 5장 1절은 신학적 주장이 집중적으로 제시되는 1~4장 전반부에서 윤리적 권면이 주를 이루는 부분(5~6장)으로의 전환점 역할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메시아를 통해 얻게 된 자유 안에 계속 머무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를 악한 시대/세대의 손아귀에서 구해내기 위하여” 그리고 “우리의 죄들의 치명적인 결과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내어)주셨다”는 점에서, 즉 예수의 죽음은 우리에게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자 그 자체로 그리스도-선물로서 주어지는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해방과 자유의 의미를 깊이 성찰하면서 다시는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만들지 않도록 깨어있어야 합니다. 혹시라도 그런 삶으로 우리를 되돌아가게 만드는 무언가가 외적인 강제로 작용하고 있다면, 단호하게 그것과 맞서 싸워야 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출하기 위해 자신을 직접 내어주셨기 때문에, 내면적으로는 아직도 전혀 의롭지 못한 우리를 우리의 속성과 무관하게 법적으로 객관적으로 의롭다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사건은 더이상 율법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없을뿐더러, 사실은 율법으로 상징되는 그 어떤 노예 상태, 예속의 상태로 돌아가려고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 바울의 중심적인 논점입니다.

요컨대, 바울이 말하는 메시아 사건, 하나님의 은혜로 선물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그리스도의 구원사건이란 결국 하나님께서 “모두에게 실질적 자유를” 제공하려는 해방의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이제 오늘의 본문인 갈라디아서 3장 26-29절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제가 이 본문을 선택한 이유는 일차적으로는 며칠 전에 감리교회에서 벌어진 참담한 사건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욱 중요하게는 신학적으로 바울이 여기서 인간이 처해 있는 노예의 상태, 예속의 삶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따라서 오늘 우리에게 메시아 사건이란 도대체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이고 무엇을 향한 자유의 실현인지에 대한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메시아 안에서 하나 된 세계

갈라디아서 3장 26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왜 율법의 지배하에 있지 않은지를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함으로 말미암아,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표준새번역과 새번역에서는 배타적으로 남성만 가리키지 않기 위해 26절의 ‘휘오스’(υιος)를 ‘자녀(들)’로 옮겼지만, 이 단어는 사실 출애굽 전승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아들’로 불린 것과 갈라디아서 2:20에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지칭한 것을 반향하고 있습니다. 물론 바울의 요점은 전통적으로 ‘아들들’만 받던 유산을 남성은 물론 여성을 포함한 말 그대로 ‘여러분 모두’로 지칭되는 그들이 공유하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새로운 출애굽, 곧 노예 상태에서 궁극적인 해방을 의미한다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아브라함 계약 안에 있는 율법의 행위들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자녀가 된 것과 대조적으로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이 아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신실함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새번역 성경에서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고 믿음의 주체를 모호하게 번역한 “디아 테스 피스테오스 엔 크리스토 이에수”(διὰ τῆς πίστεως ἐν Χριστῷ Ἰησοῦ)라는 문구는 직역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을 통해”입니다. 이 문구는 바울이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들(자녀들)”이라고 선언할 수 있게 된 근거를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대목으로서, 메시아 예수가 하나님 앞에서 행하신 신실함이 그의 안에 있는 사람들의 새로운 신분을 만들어 낸 궁극적인 동인임을 보여줍니다. 즉 단순히 “그리스도 예수를 사람들이 믿음”으로써가 아니라 오늘 읽지는 않았지만 3장 23절부터 언급되는 “그리스도의 신실함”(π́ιστις Χριστου̑)에 의해 점화된 인간의 믿음, 예수 안에서 계시된 신실함의 패턴을 재연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믿음,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일하신 하나님이 행하신 활동의 결과로 예수를 믿고 따르게 된 이들이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여기서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의 그리스도의 신실함, 그리고 그것과 분리될 수 없는 인간의 믿음 둘 다를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나오는 3장 27절을 통해서 드러나듯이 바울은 여기서 갈라디아인들이 세례받을 때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렸던 것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인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인 당신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례를 통해서 우리가 상징적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태어나는 경험을 한다는 것은 다들 잘 알고 계실 줄 믿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강조하기 위해, 더욱 의미심장하게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너희 모두가 그리스도 안으로 세례를 받았을 때, 너희는 마치 그가 너희의 옷인 것처럼 그리스도를 입었기 때문이다.” 메시아와 연합하여 세례를 받은 사람은 누구나 메시아를 옷 입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특성, 그리스도의 인격, 그리스도의 목적을 취하여 그분과 같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을 우리가 이제 가지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각자의 사회적 정체성들, 예컨대 유대인, 헬라인, 자유인, 노예, 남자, 여자 등을 대신하여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옷 입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에게서 옷 입음의 은유는 매우 특별한 종류의 변화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예컨대, 데살로니가전서 5:8-10, 고린도전서 15:53-54, 로마서 13:12절에서 볼 수 있듯이, “믿음과 사랑을 가슴막이로 하고, 구원의 소망을 투구로 쓴다”거나 “썩을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어야 하고, 죽을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고,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자”고 말할 때, 그는 언제나 이러한 옷 입음의 은유를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시작된 묵시적 전쟁, 종말론적 투쟁, 시간의 종말을 향한 투쟁의 긴장 가운데서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옷 입는다는 것은 단순히 교회 다니는 사람이라는 종교적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는 의미를 넘어섭니다.

실제로 3장 28절에 이르러 바울은 지금까지의 모든 이야기가 종교적 정체성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님을 명확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 하나님의 집안에 속하게 된다는 것은, 그들의 사회적 정체성이 무엇이든 관계없이 인류의 모든 부분을 포괄하게 됩니다. 즉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노예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가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28절이 제시하는 대립쌍의 목록은 계속 이어질 수 있습니다. 청년을 특별히 기억하고자 하는 청년주일 설교에서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는 모두 하나이기 때문에, 유대인도 헬라인도 없고, 노예도 자유인도 없고, ‘남자도 여자’도 없을 뿐만 아니라, 엄밀히 말하자면 청년도 장년도 어린이도 노인도 없는 그런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세계를 곧바로 현존하는 제도 교회와 손쉽게 동일시하곤 합니다. 갈라디아서 3장 26-29절이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세례의식에서 사용되던 일종의 신앙고백문일 가능성이 크다는 추정하에 28절의 이러한 완전한 평등과 통일의 선언은 그저 교회 안에서 성별과 계급과 인종의 차이를 넘어 신앙이라는 하나의 새로운 정체성으로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권면하는 ‘좋은 이야기’ 정도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현실의 교회 안에서도 무수한 차별과 불평등과 위계와 지배가 작동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런 식의 해석은 기만적인 이데올로기에 불과할 것입니다. 오히려 바울의 선언은 그런 허울 좋은 윤리적 권면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이야기입니다.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메시아 사건이란 하나님이 인간을 사로잡고 있던 노예와 예속의 상태에서 그들을 해방시키고 자유롭게 하시는 것을 뜻합니다. 특히 갈라디아서 2장 16절에서 바울은 율법의 행위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실함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정의롭게 하신다고 선언했습니다. 우리를 정의롭게 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를 둘러싼 억압과 지배를 깨뜨려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우리를 해방시키고 자유롭게 만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구원의 의미도 중요하지만, 그러한 구원의 근거가 율법의 행위들로 상징되는 어떤 정체성의 표지도 아니고, 나아가 인간의 편에서 믿음도 아니라는 사실이 더욱 중요합니다. 이 모든 구원사건, 세계를 정의롭게 바로잡는 하나님의 행동은 인간의 어떠한 협력도 필요로 하지 않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동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보자면, 이 세계에는 더이상 인간과 인간을 가르는 그 어떤 차별의 기준, 배제의 표지도 존재할 수 없으며, 따라서 그러한 구별짓기에 기초한 대립관계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라고 하는 우리의 삶을 규정짓는 새로운 삶의 양식과 가치에 비추어 본다면, 이 세계 안에서 인간과 인간을 나누는 것, 더 나아가 인간과 비인간, 인간과 자연을 나누는 모든 것들이 무효화되었습니다. 미국의 저명한 신약성서학자 루이스 마틴(J. Louis Martyn)의 말을 빌리자면, “이 대립쌍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는 것은 바로 세계의 종말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흔히들 기독교인을 포함하여 인류는 모두 하나의 세계를 살아가며, 그런 하나의 세계에 대해 기독교인들이 다른 생각을 가지고 다른 태도로 살아가도록 이끄는 ‘세계관’(world-view)이나 하나의 ‘주의’(-ism)의 일종이 기독교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28절을 인종적·계급적·성적 차별을 만들어 내던 세계의 종말을 선언하는 말씀으로 재해석한다면, 기독교인들은 하나의 세계에 대해 다른 세계관을 가진 이들이 아니라, 말 그대로 이 세계와는 “다른 세계”를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는 이들로 재규정됩니다. 이러한 대립쌍 위에서 작동하는 세계는 그리스도 사건에 의해 종말을 고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런 세계는 이제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른 세계를 살아가야 합니다. 만일 그 사실을 부정한다면, 그것은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그분이 성령으로 현존하심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은 다양성 속에서 존중되고 관용될 수 있는 하나의 세계관이나 이념, 주의, 문화 등이 아니라, 시공간적 차원에서 세계 자체를 다르게 구성하는 ‘사건’(event)이 됩니다. 바울신학적 관점에서 복음은 현존하는 지배적 세계를 종말론적으로 부정하고, 메시아 사건과 더불어 다른 세계가 지금 여기에 이미 도래했음을 선언하는, 그래서 이 세계와 저 세계 가운데서 하나를 선택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는, 두 세계의 공존은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과 더불어 반드시 지양되어야 할 모순이라고 주장하는, 그 용어의 본래 의미에서 ‘존재론’(ontology)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 더이상 유대인과 헬라인, 오늘날의 맥락에서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같은 종족적 차이, 백인과 흑인의 인종적 차이, 서구인과 비서구인의 문화적 차이, 노예와 자유인 또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계급적 차이, 남자와 여자의 성적 차이, 이성애자와 비이성애자의 성적 지향의 차이, 청년과 장년 또는 어린이와 노인의 세대 차이 등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 차이들이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의 일원이라는 관점에서, 인간적 대립쌍 및 차이의 범주들이 이제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없다고, 그래서는 결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메시아의 죽음과 부활을 신앙공동체의 성례전을 통해 공유한 이들이라면, 나아가 민중신학자 안병무 선생의 지적대로 “말씀이 선포되고 성례전이 행해지는 자리,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리에만 그리스도가 현존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아요. 그리스도의 이름도 모르고, 예수의 이름도 모르는 곳이라도 고난당하는 민중의 현장에는 그리스도가 현존합니다”라는 한국 민중그리스도교 전통의 위대한 역사적 신앙고백을 민중사건의 현장에서 공유한 이들이라면, 그 모두가 그 자체로 온전하고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앞에서 무의미한 가치들

오늘 살펴본 본문에 앞서는 3장 22-24절에서 바울은 메시아 예수의 신실함을 통한 약속이 오기 전까지, 율법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이 부분을 포함하여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율법은 일차적으로는 “율법의 행위들”(works of the law; ἔργων νόμου)을 가리키며, 이는 구원을 얻기 위해 도덕적 계율이나 율법조항을 성실하게 준수하는 일반적 선행이 아니라 유대인을 유대인으로 만들어 주는, 즉 언약의 백성으로서 유대인을 이방인과 구별 짓는 ‘정체성 표지’(identity marker)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 당시의 유대인들은 율법준수를 의(義; δικαιοσύνη; righteousness―하나님과의 정의로운 관계)를 얻는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여겼습니다. 유대인들이 공유했던 신념체계에 따르자면, 적어도 아브라함 때부터 이미 언약의 백성으로 선택되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출생과 동시에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안에 자동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에게 남은 과제는 평생동안 그 언약 관계 속에 계속 ‘머무름’이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할례와 음식법(식탁교제), 안식일법 같은 특정한 율법의 행위들이 유대인의 정체성을 규정하며 이방인과 유대인을 구별 짓는 일종의 정체성 표지가 된 것입니다. 바울이 당시에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을 ‘할례’와 ‘무할례’라는 말로 요약할 만큼 할례는 계약 백성의 근본적인 정체성의 표지가 되었습니다. 오늘 살펴본 갈라디아서 3장 28절의 세 가지 대립쌍, 즉 유대인과 이방인, 자유인과 노예, 남자와 여자 역시 할례를 받아야 할 사람을 결정하기 위해 설정된 기준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안식일 준수는 언약의 백성의 정체성 및 그 소속에 대한 충성을 측정하는 척도가 되었습니다. 안식일은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구별한다는 표지였기 때문에, 안식일법을 지키지 않는 것은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였습니다.

할례, 음식법, 안식일로 특정되는 일종의 범례로서의 율법은 정하고 부정한 음식, 정하고 부정한 짐승들을 구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람들도 구별하는 데 적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과 이방 민족 사이에서는 물론이고, 이스라엘 내부에서까지 거룩한 것과 속된 것, 정(淨)한 것과 부정한 것,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 좋은 것과 혐오스러운 것을 구별 짓는 기준으로 율법의 행위들이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예수와 바울이 살았던 제2성전기 유대교 시대에 이르러서 율법의 행위들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계약적 지위를 유지하는 수단에 그치지 않고, 그들의 선민으로서의 우월성과 배타적 특권을 보호하는 장치로, 즉 구원의 기득권으로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그리스도의 신실함이라는 새로운 구원의 근거를 제시한 것은 할례 의식에서 사용되던 차별과 배제의 대립쌍을 무너뜨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차별 없이 열려 있는 세례의 축복을 강조하려는 의도뿐만 아니라, 당시 유대인들이 할례와 음식법과 안식일 같은 자기네들 중에서도 일부 특권층만 가질 수 있는 정체성의 표지를 통해서 구원 또는 언약의 백성의 축복을 배타적으로 독점하고 있던 것에 반대한다는 보다 근본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율법의 행위에 반대하여 그리스도의 신실함을 통해서 정의롭게 됨을 주장하는 것은 결국 차별과 배제와 혐오를 강화하는 배타적 정체성주의를 반대하는 다른 형태·다른 논리의 ‘삶의 양식’(Modus Vivendi)을 제안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얘기인즉슨 그리스도의 신실함을 통해 정의로워진 세계는 율법의 행위들과 같은 정체성 표지에 의해 갈라지고 찢겨진 세계를 바로잡은 세계라는 말입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선 수많은 정체성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계급, 젠더, 인종, 민족성, 섹슈얼리티, 성적 지향, 국적, 지위, 직업, 정치적·종교적 입장 등에 따라서 정체성의 목록은 끊임없이 이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정체성들의 무한한 다양성과 얽혀 있는 수많은 차별과 배제, 혐오와 적대, 위계와 지배 역시 엄연히 현실로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도외시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세계가 하나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것은 각자가 지니고 있는 다양한 정체성이나 개성들을 모조리 부정하고 획일적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종교적 정체성으로 모두가 환원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각자의 사회적 정체성들은 교회 올 때는 잠시 집에 놔두었다가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만 가지고서 일시적으로 하나가 된다는 그런 의미도 아닙니다.

오늘 살펴본 본문에서 나타난 바울의 강조점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의식으로서 세례를 통해 표현되는 복음의 축복은 조건 없는 하나님의 은혜/선물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세운 모든 가치, 즉 남자됨, 유대인됨, 자유인됨, 부자됨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천명하는 것입니다. 메시아 사건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인간을 서로 비교하고 줄 세우며 차별 대우하기 위해 만든 모든 가치의 척도와 가치평가의 기준이 철저하게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런 것들은 모두 무의미한 것들입니다. 할례나 음식법, 안식일 준수 등의 ‘율법의 행위’를 그리스도인에게 다시 강요하는 것, 그리고 그러한 가치 기준에 의해 획득된 남자됨이나 유대인됨이나 자유인됨을 내세우(고 반대로 여자됨이나 이방인됨이나 노예됨을 평가절하하)는 것은 인간이 세운 유대교 전통에 따라 규정된 가치평가의 논리 안에 메시아 사건을 가두는 것이자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인간의 자산을 하나님의 은혜/선물보다 우위에 두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는 결정적 조건은 인간적 가치체계, 그리스도와 무관한 일체의 상징자본, 예컨대 민족성, 계급, 성별, 성적 지향, 장애 유무, 인종, 학력, 신분, 소득 수준 등의 목록을 단호하게 거부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저와 모든 교우 여러분들이, 그리고 특별히 오늘 청년주일을 맞이하여 서울제일교회 청년들이 그리스도를 따라서 차별과 배제를 낳는 모든 인간적 가치체계를 거부하고, 그러한 가치체계에 의해 지탱되는 불평등한 세계를 끝내는 데 앞장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예수의 길을 따르는 신앙공동체로서 서울제일교회가, 역사적으로 늘 그래 왔듯이, 앞으로도 한국 교회와 한국 사회 한 가운데서, 지금 여기의 세계를 넘어 다른 세계를 살아감으로 하나 되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계속해서 보여줄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