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마당 > 설교

설교

카테고리 2020년
제목 [6. 14] 하나님의 꿈에 협력하는 자 | 정원진 목사
작성자 seouljeil
작성일자 2020-06-14
조회수 139
첨부파일
p200614_질그릇 1단 1.pdf
 


하나님의 꿈에 협력하는 자

 

1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2믿음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서 있는 이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3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4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5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6우리가 아직 나약하던 시절, 그리스도께서는 정해진 때에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7의로운 이를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혹시 착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누가 죽겠다고 나설지도 모릅니다. 8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5:1-8, 가톨릭 새번역)

 

난해한 서신 로마서

오늘 본문 말씀이 로마서에서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에서 사용하는 Lectionary는 오늘부터 시작해서 913일까지 총 14주 동안 로마서를 서신서 본문으로 연속해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당분간 로마서를 본문으로 연속 증언을 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오늘이 그 첫 번째 시간입니다.

세간에 로마서는 난해한 서신’, 읽고 이해하기 어려운 서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로마서가 편지이기 때문입니다. 편지는 보낸 이와 받는 이가 있습니다. 발신자는 특별한 까닭이 있어서 수신자에게 편지를 써서 보냅니다. 이유 없이 편지를 써 보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다못해 학생 때 일면식도 없는 국군 장병 아저씨께 편지를 써서 보낸 경우에도 위문이라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남들이 주고받은 편지를 읽을 때, 그들이 편지를 주고받은 이유를 알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 편지는 “Conversation in Context”, “맥락/상황 속의 대화이기 때문에, “맥락/상황”(context)을 모르면 남들의 대화를 잘 알아들을 수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로마서가 편지 형식을 가졌지만, 신학 논문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로마서는 바울이 쓴 다른 편지들과는 달리 자신이 개척했거나, 목회했거나, 심지어는 방문했던 적조차 없는 공동체에 쓴 유일한 편지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자신이 방문할 계획을 세웠던 공동체에 자신을 소개하고, 자신이 하나님의 복음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에 대해 설명하려고 로마서를 썼던 것입니다. 따라서 로마서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과 그것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에 대해 바울이 이해한 바를 포괄적으로 설명한 편지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로마서는 바울의 신학 사상을 총괄한 일종의 논문입니다. 그래서 매우 소중하고, 또 그래서 매우 어렵습니다.

이 어려운 로마서로 10주 넘게 어떻게 증언할까 고민이 많았습니다. 한주 한주 본문이 주어지면, 그 본문을 잘 해설해서 마지막에 로마서의 큰 주제는 이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귀납적인 방법을 쓸까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거꾸로 로마서의 큰 주제는 이것입니다라고 전제하고, 매 주일 주어지는 본문을 그 시각에서 해설하는 연역적인 방법을 쓰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가 지금껏 오해해 왔던 바울 신학을 바로잡고, 그것에 근거해서 로마서의 본문을 제대로 이해하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꿈

로마서의 큰 주제를 한마디로 말하면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꿈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에도 잘 드러나 있습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6:10, 개역개정). 같은 구절을 가톨릭 새번역은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꿈은 하나님의 ’(will), 하나님의 ’(righteousness), 하나님의 정의’(justice)가 하늘에서만 실현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서와같이 땅에서도 실현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꿈은 죄와 불의로 고통받는 인류를 미래에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데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인류를 지금여기서 죄와 불의에서 해방하는 것입니다. , 땅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하늘이 땅으로 내려오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꿈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종말론’(eschatology)이라고 불러왔습니다. 그런데 이 종말론은 이스라엘의 제국 경험과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자리한 지정학적 위치는 아프리카와 아시아와 유럽 대륙이 만나는 곳입니다. 그래서 한 대륙에서 제국이 등장하면 언제나 다른 대륙까지 그 세력을 넓히고자 했고, 그 길목에 자리 잡고 있던 이스라엘은 그 침략을 피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탄생은 이집트 제국으로부터의 탈출’(exodus)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 이스라엘은 바울 시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제국에 의해서 끊임없이 그리고 계속해서 침략당하고, 착취당하고, 약탈당하고, 지배당해 왔습니다. 아시리아, 바빌론, 페르시아, 마케도니아(그리스), 로마가 바로 그 제국들입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세계는 하나님께 속해있고 하나님은 정의로우시다라는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경험했던 세상은 절대로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정의가 아니라 불의가, 공평이 아니라 차별이, 환대가 아니라 배척이, 배려가 아니라 무시가, 돌봄이 아니라 착취가, 평화가 아니라 전쟁이, 선이 아니라 악이 만연했습니다. 이런 속에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가진 신앙과 자신들이 경험한 현실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었을까요?

저들이 찾은 답은 이것이었습니다.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물리치실 것이다.” “God will overcome, someday!” 이것이 바로 유대교 전통이 말하는 종말론입니다. ‘종말론을 영어로 ‘eschatology’라고 하는데, 그리스어로 ‘eschaton’’, ‘종말’, ‘the end’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무엇의 끝일까요? 많은 사람이 오해하듯이 종말론은 세상의 종말’, ‘the end of the world’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종말이 아니라 악의 종말, 불의의 종말, 억압의 종말, 전쟁의 종말, 폭력의 종말, 쉽게 말해 제국의 종말에 관한 것입니다. 따라서 종말은 파괴’(destroy)와 관련이 없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보시기에 좋았다. 좋았다. 좋았다.... 참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손수 창조하신 이 좋은 세상을 파괴하겠습니까? 하나님은 다만 죄와 악으로 더럽혀진 세상을 깨끗하게 하실 뿐입니다. 따라서 종말론은 파괴에 관한 것이 아니고, 난장판이 된 세상을 깨끗이 청소하고 이상적인 세상을 회복하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학자들은 이를 하나님의 세상 대청소”(the Great Divine Clean-up of Earth)라고 부릅니다. 그렇습니다! 종말론, eschatology하나님의 세상 대청소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같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문제는 하나님의 꿈이 무엇인지는 알겠는데, 그것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였습니다. 이스라엘이 경험한 제국은 이집트, 아시리아, 바빌론, 페르시아, 마케도니아(그리스), 그리고 로마로 이어지면서 점점 더 흉포해졌습니다. 그래서 로마제국의 지배 아래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종말이 속히 오기를 누구보다 절실히 바랐습니다. 바울도 같은 희망을 품고 있었고, 그 희망의 실현 방법에 대해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습니다. 그러다가 알게 된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방법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울과 동시대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 외에도 바울과 동시대 사람들 가운데 대중운동을 이끌었던 종말론자가 많았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 사람 중 일부가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처음에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펄쩍 뛰며 반대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을 박해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그들과 한편이 되었고, 가장 적극적이고 열렬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 계승자가 되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당시 사람들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서 종말실현의 ‘paradigm shift/패러다임 전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세례자 요한은 묵시적 종말론자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날이 오면 하나님이 하늘로부터 이 땅에 초월적으로 개입’(intervention)하셔서 세상을 순식간에 바꿀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날이 오면 하나님이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어서 불 속에 던지고”(3:9),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3:17)이라고 했습니다. 그날이 오면 로마제국은 끝장나고 하나님 나라가 도래할 것이지만, 그 방법은 로마제국이 이스라엘을 침략할 때와 똑같이 폭력적일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다시 말해, 묵시적 종말론자였던 세례자 요한은 폭력을 통한 평화’, ‘승리를 통한 평화를 주장한 로마의 평화론자와 결과적으로 한편이었던 것입니다.

이에 비해 예수님은 비폭력을 통한 평화’, ‘정의를 통한 평화를 주장하며 로마의 평화에 대항해 그리스도의 평화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습니다. 그리고 그 패러다임에 따라 살았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 혼자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과 같은 뜻을 품고 하나님처럼 의로워지고 정의로워질 때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믿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혼자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우리의 참여협력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세상 대청소는 하나님이 혼자서 진공청소기를 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빗자루, 걸레, 먼지떨이 등을 들고 하나님을 거들어야 합니다. 이것을 전문용어로 참여적 종말론,’ ‘협력적 종말론이라고 합니다. 손바닥이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이,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과 우리의 collaborationcooperation이 꼭 필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기존의 종말론에 대한 예수의 ‘paradigm shift/패러다임 전환입니다. 이 전환을 긍정한 사람들이 예수가 그리스도다라고 고백했고, 바울도 그들 중 하나였습니다.

 

바울의 칭의론 재해석

우리는 바울서신을 읽을 때, 바울이 참여적 종말론자였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따라서 바울 신학의 핵심 주장인 칭의론’, 은총에 의해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justification by grace through faith)는 주장 역시 참여적 종말론의 연장선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 그리스도인들 대부분은 그렇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지난 38일 증언에서 말씀드렸는데, 다시 복습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잘못 알아 왔던 것들 가운데 첫째는 은총에 의해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을 예수 천국, 불신 지옥으로 오해한 것입니다. ,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을 예수를 믿으면 (죽어서) 천국에 가고, 안 믿으면 지옥에 간다라고 해석한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의 말을 왜곡한 것입니다. 바울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말했을 때, 그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천국에 가는지를 생각했던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어떻게 변화되고,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바울의 관심은 언제나 현세(現世)였지, 내세(來世)가 아니었습니다.

둘째는 구약성경에서 ”(righteousness)정의”(justice)는 동의어라는 것입니다. 이는 바울서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에게나 사람에게나 정의로운 행동이 올바른 행동이며, 올바른 행동이 정의로운 행동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말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믿음으로 정의롭게 된다라는 말로 바꿔 읽을 수 있고, 또 바꿔 읽어야만 합니다.

셋째는 의롭게 된다의롭다고 인정받는다로 잘못 읽는 것입니다.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라는 말은 비록 의롭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의롭다고 여겨준다는 말입니다. 이는 죄가 큼에도 불구하고 무죄선고를 내렸다는 말과 같습니다. ‘합격하기에는 점수가 턱없이 모자람에도 불구하고 합격시켜 주었다는 말과도 비슷합니다. 어이없게도 기독교는 이것을 은혜라고 가르쳐 왔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은혜입니까? 부당판결, 부정합격이 어떻게 은혜일 수 있습니까? 그것은 은혜가 아니고 불의입니다. 앞에서 성경에서 정의동의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말은 정의롭다고 인정받는다라는 말이 됩니다. 이 말은 정의롭지 못한 것이 정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공의로운 하나님이 하는 일일 수 있겠습니까! ‘불의정의라고 하는 하나님? 그런 분은 결코 하나님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네가 비록 의롭지 않아도 내가 의롭다고 여겨주겠다고 하실 리가 없습니다. 바울이 이야기한 의롭게 된다라는 말은 결코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실제로 ()의롭게 변화되는 것을 뜻했습니다.

 

거위의 꿈

이런 전제들을 바탕으로 오늘의 본문 말씀을 보겠습니다. 본문 1절은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믿음, 믿음에 기초한 행위정의롭게 변화된우리가 로마의 평화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평화를 누리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 우리는 세상이 정상이라고 말하고 가르치는 힘의 추구가 아니라, ‘힘의 포기속에서 참된 평화를 누리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제가 힘의 추구의 대응어를 힘의 포기라고 한 것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힘의 포기는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힘을 쓰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안 쓰는 것못 쓰는 것은 다릅니다. ‘있어도 안 쓰는 것없어서 못 쓰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힘을 추구하지 않을 뿐이지, 힘을 기르지도 않는 것은 아닙니다. 평소에 힘을 꾸준히 길러서 힘이 있지만, 그 힘을 사사로이 그리고 폭력적으로 쓰지 않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2절은 믿음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서 있는 이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라고 증언합니다. 이 구절에서는 믿음은총/은혜의 관계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악의 종말, 불의의 종말, 억압의 종말, 전쟁의 종말, 폭력의 종말, 즉 제국의 종말에 대해서 약속하셨습니다. 그 희망을 은혜로 선물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은혜에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요? “믿음이 바로 그 답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은혜에 대한 인간의 응답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받게 되는 선물이지만, 우리는 신앙(믿음)을 통해 그 구원에 참여하게 됩니다. 여기서 바울은 참여적 종말론을 그의 언어, 그의 표현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2절 하반절에서 바울은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번역은 약간 오해의 소지가 있는데, 원어를 그대로 영어로 번역하면 “We rejoice in the hope of the glory of God”입니다. 우리말로는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의 희망 안에서 기뻐한다입니다. 핵심은 시제가 미래가 아니라 현재라는 것입니다. 풀이하면 이 말은 지금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나라가 부분적으로 실현되고 있는데 내가 그것에 동참하고 있어 기쁘다, 또 장차 그 나라가 전면적으로 실현될 것인데 그 희망 안에서(와 내가 그것에 기여한다는 사실에) 기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3절에서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라고 증언합니다. “환난에도 불구하고 자랑한다가 아닙니다. “환란을 자랑한다입니다. ? 세상은 승리를 통한 평화, 힘을 통한 구원이 정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너도 그렇게 살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나는 정의를 통한 평화, 힘의 추구가 아닌 힘의 포기, 즉 십자가를 통한 구원을 추구합니다. 그러니 당연히 이 세상에 살면서 환란을 당합니다. 그런데 그 환란은 내가 세상 풍조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추구하며 산다는 분명한 표시입니다. 증표입니다. 그러니 어찌 자랑스럽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3b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4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5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처음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예수 믿고 복 받아 부자 되고 떵떵거리며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환난을 당하고 고생하지만 나중에 죽은 후에는 천당에서 영원한 복락을 누리리라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환난을 당하면서도 희망을 품고 기뻐했던 이유는 그 환난이 세상의 제국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 나라가 이 땅 위에서 전면적으로 실현되게 만드는 고난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꿨던 꿈은 거위의 꿈이었습니다. 헛된 꿈은 독이고 세상의 끝은 이미 정해져서 돌이킬 수 없다고 세상 사람들이 말할 때 그 운명이란 벽 앞에 당당히 마주서서 그 벽을 넘어 날아가는 거위의 꿈이었습니다. 그렇게 날고 싶은 거위의 꿈을 무거운 세상이 묶을 수 없었던 것처럼, 첫 그리스도인들의 종말실현의 꿈은 그 무엇으로도 묶어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 꿈은 하나님의 꿈이자, 하나님의 꿈에 협력하는 자들의 꿈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만의 꿈이면 때론 실망하고 절망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꿈이기도 하기에, 하나님의 약속이기에 끝까지 희망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무슨 꿈을 꾸며 삽니까? 첫 그리스도인들처럼 하나님의 꿈에 협력하는 자로 삽니까? 마침 오늘이 총회선교주일인데, 우리 기장교단은 첫 출발 때처럼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의 꿈에 협력하고 있습니까? 이 질문 앞에서 겸허히 자기 자신을 돌아보시고, 첫 그리스도인들처럼 하나님의 꿈에 협력하는 우리와 서울제일교회, 한국기독교장로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