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람은 죽었는가?

15백성이 그리스도를 고대하고 있던 터에, 모두들 마음속으로 요한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그가 그리스도가 아닐까 하였다. 16그래서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여러분에게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나보다 더 능력 있는 분이 오실 터인데,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소. 그는 여러분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오. 17그는 자기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려고, 손에 키를 들었으니,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오.“…21백성이 모두 세례를 받았다. 예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시는데, 하늘이 열리고, 22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예수 위에 내려오셨다. 그리고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울려 왔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는 너를 좋아한다." (눅 3:15-17,21-22)

주님의 세례일

오늘은 교회력으로 ‘주님의 세례(주)일’(Baptism of the Lord)입니다. 대림절로 시작하는 교회력은 12월 25일 크리스마스 후 12일째 되는 1월 6일을 ‘주현절’(主顯節, Epiphany)로 지킵니다. 주현절은 동방박사들이 황금과 유향 그리고 몰약을 가져와 아기 예수에게 경배했던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주현 절기’는 사순절 직전 주일인 ‘(산상)변모주일’까지 계속되는데, 그중 ‘주현절 후 첫째 주일’은 ‘주님의 세례일’로 지킵니다. 이날은 그때까지 갈릴리 나사렛이라는 촌구석에 묻혀 살던 예수가 역사 속에 당신 모습을 드러내고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사건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동시에 주님의 세례에 비추어서 우리 각자가 받은 세례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서구) 교회에서는 ‘주님의 세례일’인 오늘 ‘세례언약 재확인 예식’을 합니다. 결혼 25주년에 은혼식을 하고, 50주년에 금혼식을 하는 것과 비슷한 이유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세월이 가면 첫사랑의 감격이 희미해지고 무뎌집니다. 그래서 첫사랑을 회복하기 위해 재확인 예식을 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을 보면 주님께서는 에베소교회를 나무랍니다. 이유는 “처음 사랑을 버린 것” 때문입니다(3절). 그래서 “네가 어디에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해 내서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을 하라”(4절)고 당부합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세례언약 재확인 예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가?

저는 개인적으로 교회의 여러 예식(ritual) 중에 ‘세례식’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세례받았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분이 계십니다. 정확한 날짜는 몰라도 적어도 “oo년 oo절에 oo교회 ooo목사님에게 세례를 받았다”라는 정도는 기억해야 할 텐데…. 아마 그런 분도 결혼기념일과 결혼주례자는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개신교인’에게 세례식은 결혼식보다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가톨릭의 ‘일곱 성사’(세례, 견진, 성체, 고해, 혼인, 병자, 성품)가 ‘교회(종교)개혁’ 후 단 두 개만 개신교회의 성례전으로 남은 것에서 확인됩니다. 그 둘은 ‘세례’와 ‘성찬만’입니다. 그러니까 결혼식은 탈락하고, 세례식은 남은 것입니다. 그만큼 세례식이 중요합니다.

우리 교인은 아시겠지만, 저는 세례식을 아주 성대하게 거행합니다. 보통 부활절에는 성인 세례식을, 성탄절에는 유아 세례식을 거행하는데, 둘 다 성대하게 합니다. 장로나 권사 임직식 보다 더 신경 씁니다. 왜? 임직식은 (일종의) ‘성품성사’, 즉 ‘일곱 성사’에 해당하지만, 세례식은 성례전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중요한 예식임에도 불구하고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분이 계신 것은 여러분 문제가 아니라 교회 문제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한국 개신교회가 교인 양산을 위해 세례를 남발했기 때문입니다. 논산훈련소에서 베푸는 ‘진중(陣中) 세례식’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러한 소위 ‘초코파이’ 교인이 어떻게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세례받았는지를 기억할 수 있겠습니까! 세례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만도 대단한 일일 것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혹시 내용 없이 형식적으로 세례를 받은 분이 계신다면, 오늘 거행하는 ‘세례언약 재확인 예식’을 통해 과거 부족했던 내용을 채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례(식)의 의미

그렇다면 세례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첫째, 세례는 기독교의 입교의식입니다. 누구든지 기독교인이 되려면 반드시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고, 하나님 나라의 구성원이 되고,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은 예수가 요단강에서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을 때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울려왔다고 증언합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눅 3:22). 그렇습니다! 세례의 핵심은 하나님께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딸이다”라는 말씀을 듣는 데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는 것에 그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서 ‘자녀로 인정받는다’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날 때부터 이미 하나님의 자녀였습니다. 그런데 그 부모자식관계가 끊어졌습니다. 이유는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이면서 하나님 뜻에 따라 살지 않고 제멋대로 살았습니다. ‘죄’의 자녀로 살았습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은 집 나간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처럼 미리 용서하고 기다리셨습니다. 선(先) 회개, 후(後) 구원이 아닙니다. 회개하지 않았지만, 미리 용서하고 받아들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지만 그것을 몰랐거나 인정하지 않고 살아온 우리에게 하나님은 “내가 너를 내 자녀로 인정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언제? 세례받을 때. 이를 ‘은혜’라고 합니다. 비록 자격이 없지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기꺼이 인정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왜 하필 세례를 받을 때일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발성을 존중합니다. 강제로 우리를 회개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집 나간 탕자가 스스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실 뿐입니다. 하지만 탕자가 돌아오면 버선발로 동구 밖까지 뛰어나와 맞이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요 은혜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이 지극한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둘째, 세례는 중생/거듭남을 상징하는 의식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에게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물속에 몸 전체를 담그는 침례를 받았습니다. 우리 몸이 물속에 잠기면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숨을 못 쉬면 죽습니다. 이렇듯 세례란 물속에 잠겨서 죽었다가 물 밖으로 나오면서 다시 살아나는 것을 뜻하는 의식입니다. 이렇듯 세례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부활을 상징하는 의식입니다. 그렇습니다! 세례란 옛 자아를 물속에 죽이고 새로운 자아로 다시 태어나는 의식입니다. 마치 옛 이스라엘 백성이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서 홍해를 건넜듯이, 이제는 주님의 뜻만을 따르기 위해 자기 뜻을 물속에 수장시키는 일입니다. 즉 옛사람에 대해서 죽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의식입니다. 이렇듯 세례는 사랑받아서 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세례탕

일반적으로 교회는 세례의 의미로 이 둘—입교의식과 거듭남을 상징하는 의식을 듭니다. 이 둘은 세례가 기독교 종교의식임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초대 교회에서 ‘세례를 받는다’거나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 의미만 갖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치적인 결단을 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저의 <역사적 바울의 도전>이라는 강의를 들은 분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 앞에서 설명한 세례의 두 가지 의미에 하나를 더하면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의식입니다. 이것 역시 성경에 여러 번 나오는 표현인데, 그 정확한 의미는 굉장히 정치적입니다. 왜? 예수는 정치범으로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초대 교회 건축물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불법 종교일 때는 교회 건물을 지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주후 313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합법 종교로 공인한 후에 4세기부터 교회 건물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지어진 교회 건물 한쪽 내부에는 반드시 세례탕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세례탕’(baptismal font)은 사진과 같이 십자가 모양으로 만들어졌는데, 마치 ‘석관’(石棺)처럼 보입니다. 모양만 보면 ‘세례무덤’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해 보입니다.

성서학자 존 도미닉 크로산(Crossan)은 이것을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한 세례 신학을 건축물로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십자가 모양의 세례탕은 예수님이 달려 돌아가신 십자가를 형상화한 것입니다. 세례를 받는 사람은 계단을 따라 물이 담겨 있는 탕으로 걸어 들어가 물속에 잠겨 예수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해 반대편 계단으로 걸어 올라오는 것이 당시의 세례 의식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초대 교회의 세례식은 내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가 예수와 함께 다시 살아난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의식이었던 것입니다.

로마에 대해 죽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단순한 ‘거듭남’이나 ‘중생’이 세례의 핵심이 아닙니다. 세례의 핵심은 예수와 ‘하나 되는’(at-one-ment) 죽음과 부활에 있습니다. 단순한 죽음과 부활이 아니라, 예수와 ‘하나 되는’ 죽음과 부활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십자가 형상을 본떠 세례 무덤을 만든 것입니다. 당시에 십자가는 무엇이었습니까?  ‘사형틀’이었습니다. 예수는 사형틀에 왜 달렸습니까? ‘죄’를 지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죄였습니까? 예수가 지은 죄는 윤리적이나 도덕적인 죄가 아니었습니다. 반인륜적인 범죄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로마에 반역한 죄’였습니다. ‘십자가’는 바로 그런 죄를 지은 사람만 처형하던 ‘사형틀’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는 로마에 저항했기에 로마 제국에 의해 십자가에서 처형당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죄’는 그냥 죄가 아니고 ‘세상죄’요 ‘구조악’입니다. 이렇듯 예수는 로마에 의해서(by Rome) 그리고 로마에 대해서(to Rome) 죽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의해서(by God), 하나님에 대해서(to God) 부활해서, 하나님과 함께(with God) 살았습니다.

세례는 바로 이러한 예수와 ‘하나가 되는’ 의식입니다. 따라서 세례를 통해서 크리스천들도 예수 그리스도처럼 로마에 대해서(to) 죽고, 예수를 위해서(for) 예수 안에서(in) 부활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즉, 크리스천은 로마인으로서 세례 무덤 계단을 내려갔지만, (거기서 로마의 가치에 대해서 죽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로 사는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서) 반대편 계단으로 올라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크로산은 다음의 그림에서 세례 과정을 “Dying to Rome, Living for Christ”(로마에 대해서 죽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고)라고 요약해 놓은 것입니다.

앞에서 예수를 죽임당함에 몰아넣은 ‘죄’는 ‘세상죄’요 ‘구조악’이라고 했습니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시대의 풍조’이고 ‘세상이 정상이라고 말하는 삶’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아 로마에 대해서 죽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게 되었다는 것은 ‘세상’에 대해서, 즉 ‘세상의 가치’에 대해서 죽고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위해서 살기로 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우리는 세상 안에 존재하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 속한 사람들이다. 지금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꿈꾸며(교회공동체 안에서) 새로운 생활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라는 뜻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바울은 자신이 세운 하나님 나라 운동 공동체를 ‘교회’—‘에클레시아(ekklesia)’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밖으로(ek) 불림 받은(kle) 공동체라는 뜻입니다. 세상의 질서로부터 탈출해서 하나님 나라의 질서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세상의 풍조, 세상의 질서, 세상의 생활방식, 세상의 가치, 세상의 이념을 거부하고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추구하며 사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세례는 내가 그런 공동체의 일원이 되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현이고, 앞으로 그렇게 살겠다는 하나님과의 약속입니다. 우리가 받았던 세례는 이런 엄청난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세례를 받을 때 이미 죽여서 묻었던 세상 욕망이 스멀스멀 일어나 지배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갈망은 먼 전생의 기억처럼 아주 멀고 희미하지는 않습니까? 지금 여러분은 새 생명으로 삽니까? 아니면 다시 옛 생명으로 돌아갔습니까? 그래서 우리에게는 ‘세례언약 재확인 예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예식을 거행하면서 세례를 받을 때처럼 신앙을 고백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에 도전하는 세상의 온갖 악과 권세를 버리시겠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여러분을 끊어 놓는 죄의 길을 버리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와 그를 주님과 구주로 모시겠습니까?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신실한 제자가 되어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그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의 사랑을 나타내겠습니까?” 이 질문들에 대해 기꺼이 “예”라고 대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례언약 재확인 예식

오늘 ‘세례언약 재확인 예식’에 참여하는 분은 앞에 나와 무릎을 꿇고 물그릇에 손을 넣어 조약돌을 꺼낸 후 잠시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그릇에서 조약돌을 꺼내기 위해 여러분은 차가운 세례수를 만져야 할 것입니다. 차가운 세례수는 여러분의 세상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을 수장시킬 무덤을 상징합니다. 그러니 짧은 시간이겠지만 그것을 느껴보시기를 바랍니다. 또 거기에 담겨 있는 차가운 조약돌은 구약의 여러 예언자가 지적했던 우리들의 ‘돌심장’을 상징합니다. 열정이 없어 차갑고 딱딱하게 굳어진 우리 자신을 상징합니다. 그런 자신을 물속에서 건져내 양손으로 감싸 보듬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다음 사람을 위해서 오래 기도할 수 없으니, 조약돌을 들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를 찬송하며 계속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차가웠던 구슬이 어느새 따뜻해질 것입니다. 마치 차가운 ‘돌심장’이 따뜻한 ‘살심장’으로 변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무엇보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딸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고 하는 주님의 음성을 확인하십시오.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 그 부르심에 다시 응답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 나라의 일원으로,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 살아가십시오. 세상에서 살아갈 때 다른 세상이 가능함을 확신하며 그 세상을 앞서 실현하며 살아가십시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