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과 새 하늘 새 땅

1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이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 2나는 또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와 같이 차리고,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3그 때에 나는 보좌에서 큰 음성이 울려 나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보아라, 하나님의 집이 사람들 가운데 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요,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4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니,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5그 때에 보좌에 앉으신 분이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 (계 21:1-5a)

5.18 민주화운동 45주년 기념주일

오늘은 우리 교단이 제정한 ‘5.18 민주화운동 기념주일’입니다. 원래 다음 주일인데, 다음 주일은 우리 교회의 ‘창립 72주년 기념주일’이기에 한 주일 앞당겨 지키게 되었습니다.

올해 ‘5.18 민주화운동 기념주일’은 다른 해보다 조금 더 특별합니다. 첫째는 ‘45주년’이기에 그렇고, 둘째는 ‘12.3 비상계엄’의 모델이 된 ‘5.17 비상계엄’ 때문에 그렇고, 셋째는 80년 5월 광주를 다룬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를 집필한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이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5.18 민주화운동 기념주일’이어서 그렇습니다.

한강 작가는 <소년이 온다>를 쓰는 동안, 과거가 현재를 돕고 있다고,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하고 있다고 실제로 느낀 순간들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내란의 시기에 우리에게 ‘예언’이자 ‘계시’였습니다. 12.3 계엄의 밤에 국회로 달려가 맨몸으로 장갑차를 멈춰 세우고 맨손으로 무장한 군인들을 제지하던 시민들의 행동은 1980년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에 항거하며 분연히 일어섰던 5.18 민주화운동을 기억하고, 독재의 참혹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출이었습니다. 또 계엄군과 경찰도 내적 충돌을 느끼면서 최대한 소극적으로 움직였는데, 이 역시 5.18 당시 신군부의 하수인이 되어 역사의 죄인이 되었던 선례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듯 ‘시민들의 적극적인 저항’과 ‘군경들의 소극적인 임무 수행’ 덕분에 국회는 신속하게 비상계엄 해제 요구를 결의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국민은 한강 작가가 말한 과거가 현재를 돕고,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하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었습니다.

80년 광주는 고유명사가 아니고 보통명사다

소설 <소년이 온다>는 장편소설이지만 그렇게 길지 않습니다(215쪽). 하지만 읽기는 쉽지 않습니다.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실례를 볼까요?

부엌에서는 작은엄마들이 엄마와 함께 음식을 만들며 속삭이듯 이야기를 나눴다.

유방을 칼로 갈랐다요.

시상에……

뱃속에서 애기를 끄집어냈단 말도 있어라.

시상에 뭔 일이단가……

재작년에 희영 아가씨하고 선봤던 사람 말이여. 왜, ㄱ중학교 수학 선생 있었잖은가. 사람 괜찮았는디 우리하고는 인연이 안됐제. 그 사람 아내가 이번에 잘못되었다네. 만삭이었다든디, 집 앞에서 남편 기다리다가.

애기 엄마는 총을 맞고 이미 죽어버렸는디, 뱃속에서 애기는 살아갖고 몇분을…… (197-198쪽)

이렇듯 소설 <소년이 온다>는 80년 5월 광주에서 벌어진 잔혹한 학살의 참상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합니다. 하지만 광주의 열흘은 ‘지옥’만은 아니었습니다. ‘천국’이기도 했습니다. 시위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시민들과 어린 학생들도 주먹밥을 나눴고, 부상자들을 돌봤으며, 피가 부족하면 기꺼이 헌혈에 나섰습니다. 광주는 철저히 고립되었고, 시민들이 무장도 했지만, 단 한 건의 약탈이나 절도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12.3 비상계엄이 발발했을 때, 마침 한강 작가는 노벨문학상 수상을 위해 스웨덴 스톡홀름에 있었습니다. 현지 시각으로 12월 7일에 한강 작가는 스웨덴 한림원에서 “빛과 실”이라는 제목으로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을 했는데, 그 강연 중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쿠데타를 일으킨 신군부에 저항하다 곤봉과 총검, 총격에 살해된 시민들과 학생들의 사진들이 실려 있는 책(의)… 그 훼손된 얼굴들은 오직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으로 내 안에 새겨졌다. 인간은 인간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가, 나는 생각했다. 동시에 다른 의문도 있었다. 같은 책에 실려 있는, 총상자들에게 피를 나눠주기 위해 대학병원 앞에서 끝없이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의 사진이었다. 인간은 인간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가. 양립할 수 없어 보이는 두 질문이 충돌해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되었다.

열두 살의 어린 소녀가 서가에 거꾸로 꽂힌 <광주 사진첩>을 우연히 발견해 어른들 몰래 읽은 후 품게 된 의문들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어떻게 이토록 폭력적인가? 동시에 인간은 어떻게 그토록 압도적인 폭력의 반대편에 설 수 있는가? 우리가 인간이라는 종에 속한다는 사실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질문은 먼 훗날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될 한 작가의 평생 화두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 기독교가 그 뿌리인 유대교 때부터 묻고 대답해 왔던 질문이기도 합니다. 이는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 중에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에서도 확인됩니다.

인간의 잔혹성과 존엄함이 극한의 형태로 동시에 존재했던 시공간을 광주라고 부를 때, 광주는 더이상 한 도시를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가 된다는 것을 나는 이 책을 쓰는 동안 알게 되었다.

그렇습니다! 작가의 말처럼 80년 5월의 ‘광주’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였습니다. 힘을 가진 자의 폭력과 그 폭력에 끝까지 저항하며 인간의 위대함과 존엄함을 웅변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니까 80년 5월 광주는 ‘인류의 문명사’를 축약해 놓은 ‘모델’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증언을 준비하면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노래한 요한계시록 21장 말씀을 본문으로 골랐습니다.

종말론

저명한 신약성서 학자이자 역사적 예수 연구가인 존 도미닉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은 몇몇 책에서 “성경은 왜 천지창조의 시기를 (하필) 기원전 4,000년 무렵으로 잡고 있는가?”를 질문했습니다. 그리고 그 답을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살았던 수메르인들의 신석기 혁명에서 찾았습니다. 잘 아시듯이 신석기 혁명은 그때까지 사냥이나 채집 활동으로 식량을 구하던 인류가 직접 씨를 뿌리고 농사를 지어 먹을 것을 마련하게 된 혁명을 가리킵니다.

이 신석기 혁명은 인류 역사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생산성 향상’이었습니다. 그전까지는 생산성이 낮아서 열심히 일해도 입에 풀칠하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생존 유지에 필요한 식량조차 생산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생산성이 향상되니 ‘잉여생산물(剩餘生産物)’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의 생존 유지에 필요한 식량 이상을 생산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순기능뿐 아니라 역기능도 했습니다. 그 잉여생산물을 힘으로 빼앗고자 하는 자들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폭력이 난무하고, 무기가 발달하고, 계급이 발생했습니다. 그때까지 노동력을 출산하는 여성이 중심이었던 사회는 이제 여성보다 힘이 센 남성 중심의 위계 사회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크로산은 창세기가 말하는 ‘죄’를 ‘폭력의 증대’로 설명합니다.

신석기 혁명 이후 인류는 ‘힘을 숭배’하게 됩니다. 그래서 월터 윙크(Walter Wink)는 인류는 아주 오래전부터 “힘이 인간을 구원한다”고 믿어왔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그가 강조한 소위 ‘구원하는 폭력이라는 신화’입니다. 윙크의 말처럼 인류는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힘을 추구하고 숭배하고 신앙했습니다: 힘이 최고다. 그러니 힘을 키우고, 힘을 가져라. 그러면 상대방과의 경쟁에서 승리할 것이다. 그리고 그 승리가 너에게 ‘평안’을 가져다줄 것이다. 이것이 개인과 사회와 국가의 구호요, 가치요,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인류 역사에서 ‘힘의 최고 결정체’는 ‘제국’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는 기독교와 그 뿌리인 유대교는 그 제국들과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유대교의 출발인 ‘야훼 유일 신앙’은 이집트 제국으로부터의 ‘탈출’(exodus)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또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에서 비롯된 기독교의 탄생도 로마제국 반대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은 힘을 추구하고 숭배하고 신앙했지만, 유대교와 기독교는 그렇지 않았던 것입니다.

유대교와 기독교는 종말론, 새 하늘 새 땅, 하나님 나라를 믿습니다. 비록 용어는 달라도 그 용어들 가리키는 것은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현실”이 그것입니다. 종말론은 세상의 종말, 즉 the end of the world가 아닙니다. 정의가 아닌 불의, 공평이 아닌 차별, 평화가 아닌 전쟁, 선이 아닌 악이 만연한 세상에서 “God will overcome, someday!”를 소망하는 것이 종말론입니다. 즉 종말론/Eschatology은 악의 종말, 불의의 종말, 억압의 종말, 착취의 종말, 폭력의 종말, 제국의 종말을 가리킵니다.

‘새 하늘 새 땅’도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의 본문이 증언하듯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것, 하나님의 집이 사람들 가운데 있는 것, 하나님이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셔서 다시는 (억울한) 죽음도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는 현실”을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도 “하나님의 통치가 하늘에서뿐만이 아니라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현실”을 가리킵니다.

도청 광장에서 빛의 혁명까지

간단히 말해 기독교는 ‘정의가/사랑이 힘이 되는 세상’을 추구해 왔습니다. 이에 비해서 세상은 ‘힘이 정의가 되는 세상’을 추구해 왔습니다.

철학자 강신주는 ‘힘이 정의가 되는 세상’에서는 사람이 ‘님’과 ‘놈’으로 갈린다고 통찰했습니다. ‘님’은 ‘놈’을 개·돼지 취급하고, 이등 시민으로 열등하게 대우하며, 종교적 죄인으로 대합니다. 하지만 ‘정의가/사랑이 힘이 되는 세상’에서는 모든 사람은 형제자매로 존중받고, 배려받고, 대우받습니다. 기독교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로 인정합니다. 그런데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주장하면, 예수 안 믿는 사람은 배척하고 정죄하게 됩니다. 의도하지 않아도 대동세상이 아니라 차별세상을 추구하게 됩니다. 차별 세상은 기독교가 추구하는 미래가 아니라 거부하고 끝장내야 하는 세상입니다.

오늘 우리가 5.18을 기리고 광주 정신을 계승하고자 하는 것은 대동 세상, 종말론, 새 하늘 새 땅, 하나님 나라를 꿈꾸고, 만들고, 확산하는 일에 다름 아닙니다. 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미완으로 그쳤습니다. 하지만 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부활했습니다. 도청광장이 광주에서 전국이 광장으로 확산됐습니다. 하지만 87년 민주항쟁은 절반의 성공에 그쳤습니다. 그러나 2016년, 17년에 촛불혁명으로 다시 활활 타올랐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빛의혁명으로 다시 이어졌습니다. 45년이 지난 오늘 5월 광주는 전국으로 확장되었고 열사들이 꿈꾸었던 내일이 우리의 오늘이 되었습니다. 광주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일반명사입니다. <소년이 온다>라는 소설 제목처럼 과거가 현재가 되는 사건입니다.

부디 기독교가 오늘 여기에서 광주의 현재화를 방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기독교가 꿈꿔온 누구나 환영받고 모두가 대접받는 하나님 나라를 오늘 여기에 이루는 일에 광장의 시민들과 함께 이바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